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랑의 학교/에피소드 (문단 편집) == 코르베 신부 == || '''배경''' || 1941년 7월 폴란드 || || '''출전''' || 실화 || || '''애니화''' || X || 유대인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1명의 수감자가 탈출했다. 24시간 내에 탈출자가 체포되지 않자 수용소 당국은 그 보복으로 [[무작위]]로 선정한 10명의 수용자를 굶어죽는 방에 넣어 굶어죽게 하는데, 10번째로 뽑힌 "프란치셰크 가이오니체크"라는 [[폴란드군]] 병사가 "내겐 나이든 부모와 처자가 있어! 살려줘!"하고 호소하자 반나치 활동으로 수감되어 있던 "코르베" [[신부(종교)|신부]]가 나서 '''"가족이 없는 내가 저 사람 대신 죽겠다"'''고 한다. 그 청을 받아들인 수용소장 "프리츠"는 아사방에 이들 10명을 집어넣었는데, 공포와 좌절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이 방이 성가와 기도로 채워져, 감시병들이 전율할 정도였다. 15일 뒤에 9명이 다 죽고 코르베 신부만 남게 되자, 프리츠 소장은 의무실로 신부를 데려가라고 한 다음 [[페놀]] 주사로 안락사시켰다.[* 그를 살리고 싶었지만 상부의 명령으로 어쩔수 없이 고통없이 보내주기 위해 안락사 시킨 것.] 전쟁 후까지 살아남은 가이오니체크는 코르베 신부의 희생을 생생하게 증언하여 [[교황청]]에 의해 [[복자]]로 시복될 수 있도록 했다. * 실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가 선종한 1941년 당시,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수용소가 아니라 폴란드군 포로수용소로서 반나치 인사들도 같이 수감된 형태였다. 또한 가스실도 없었으며 규모도 작았고, 후에 그것처럼 공장화된 화장터도 없었다. 콜베 신부를 처형한 프리치(Karl Fritzsch)[* 재조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항목 참조. 치클론B 가스로 유대인을 죽이는 것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라고도 한다.]는 전체 수용소장이 아니라 일부 감독이었으며, 아우슈비츠 전체의 책임자는 [[루돌프 회스]]였다. 처형 장소 역시 의무실이 아니라 아사실이었다. 콜베 신부의 희생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가이오니체크는 1944년 10월 25일에 다른 수용소로 옮겨졌다가 수용소 생활 5년 5개월 9일만에 연합군에게 해방되었다. 그의 아내도 전쟁에서 살아남았으나, 아들은 소련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이후 1971년 콜베 신부의 [[시복식]]은 물론 1982년의 [[시성식]]까지 참례하고 1995년에 생을 마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